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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글쓰기 자조 모임을 시작하다

아직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지 네 달이 됐을 때,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십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건강도 너무 안 좋아지고 조직 생활에, 인간관계에 지쳐 다 그만 두기로 했다. 실은 그 동안 조금씩 외주편집과 번역 등 일감을 찾으며, 프리랜서로 살 준비를 했었다.

 

그러고 나서 십년을 출판 번역가로, 두문불출 살았다. 한 달에 한두 번 편집자를 만나거나 친구를 만나는 이외에, 술도 안 마시고 매끼를 건강식으로 해먹으며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보냈다.

 

물론 번역가로 사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돈을 안 주는 출판사나, 아예 책 출간 자체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저런 괴로움들이 있었지만, 처음 맞이하는 혼자만의 삶과 자유는 정말 평화로웠다. 누구는 안빈낙도라고 표현하기도.

 

아무튼 십년을 그렇게 사니 건강도 회복되었고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슬슬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고 편집자들도 더 자주 만나면서 했던 말은 나 정당 활동이라도 할까봐였다. 물론 비웃음만 당했고 나도 정의당 홈페이지를 딱 한 번 들어가 봤을 뿐 차마 가입 버튼을 누를 생각은 못했다. 내가 지역당 모임에 참석하거나 선거 운동을 돕는다?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글을 쓰고 싶었다. 이전까지는 돈을 받지 않는 글은 쓰지 않는다.”는 게 모토였다. 하지만 사회적 관계가 많이 단절되고 자손도 남기지 않는 미래가 거의 확실해지자, 내가 이 지구에 살았던 흔적을 어떻게 남길까 하는 욕망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블로거라도 되어 글을 남기고 싶었다. 더불어, 이제는 입력보다는 출력을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그런데 말이다, 이런 미약한(!) 동기로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려대기는, 웬만한 의지력의 소유자가 아니고서는 참 힘들더라. 그러다가 한 친구에게 글쓰기 모임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세대가 다른 그 친구의 모임 방식은 처음엔 좀 충격이었다.

 

나도 물론 대학 때 독서 모임이나 창작 모임은 해보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것들은 다, 미리 읽어오거나 미리 써온 다음, 서로 의견 교환을 가장한 까대기를 하는 모임이었고 상처뿐인 마음을 질펀한 술판으로 달래는, 혹은 원래부터 술 마시는 게 목적인 모임들이었다. 그렇게 서로에게 지적을 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신세대 친구가 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은 (1) 모여서 30분 얘기하고 1시간 각자 글 쓰고 30분 동안 서로 읽고 평해준다 (2) 우울해지는 글 말고 기분 좋아지는 글을 쓴다. 평해줄 때도 서로 나쁜 얘기는 하지 않는다. 오로지 격려만. (3) 배부르면 글을 쓰기 싫어지므로 저녁을 굶고 쓰며, 서로 감정이 얽힐 수 있는 뒤풀이는 하지 않고 쿨하게 헤어진다

 

그런 원칙을 듣고 나는 흔히 미국 영화에서 보았던 알코올중독 자조 모임을 떠올렸다. 인간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지만, 원래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질 않았다. 인간은 전형적인 사회적 동물이고 다른 사람과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게 유전자가 프로그램돼 있다.

 

혼자서는 절대 써지지 않던 글도 마감이 생기고 누군가 독촉을 해주면 써지고, 정말 쓰고 싶지 않던 마음에도, 어떻게든 모임에 나가 다른 사람들 다 키보드를 두드려대고 있는 모습을 보면 뭐라도 쓰게 된다. 그리고 글쓰기가 끝나면 한 명 이상의 사람이 나의 글을 열심히 읽어준다. 그 희열이란...

 

그렇게 나도 글쓰기 모임을 하게 되었다. 이 얘기를 다른 친구에게 들려주었더니, 인간을 도구로 이용하는 모임 아니냐고 비딱하게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속성을 이용하는 거라고 반박해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글쓰기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밖에도 10년 동안 눌러두고 있던 나 자신의 사회적 성향을 요즘 조금씩 풀어내고 있다. 그와 함께 많은 인간관계상에 갈등도 생겼고, 평화롭던 일상은 이제 끝난 것 같다. 그래도 당분간은 이런 생활이 즐겁고 의욕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