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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 본능과 권력에 대한 탐욕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인간은 남을 싫어하지만 무리를 이루지는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으므로 사회를 만들었다’는 논리가 자꾸 반복되고 있다.   일견 맞는 말이긴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인간은 혼자서도 살 수는 있다. 단지 여럿이 힘을 합칠 때보다 더 잘 살지는 못할 뿐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무리를 이뤄야 더 잘 살기 때문에 사회를 만들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말하자면 그건 발전 욕구일수도 있지만 다른 말로 하면 탐욕인 거 아닐까? 즉 인간은 탐욕을 부리기 위해 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꾸 무리를 짓고 싶어하는 건, 더 잘 살기 위한 탐욕인 거다…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극단적인 생태학적 기준에서는 좀 다르겠지만, 여러 다른 기준으로 봤을 때 인간의 탐..
굳이 모임을 해서 글을 쓰는 자의 2년차 경과 보고 2020-10-26 17:06:14   글은 그냥 혼자 쓰면 된다. 아마 세상의 수많은 일들 중에 혼자서 해도 되고, 또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일을 하나 꼽으라면 글을 쓰기, 가 될 것이다.   그런데 굳이 글쓰기 모임을 참석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나. 처음엔 지인들과 함께 했고, 6개월쯤의 즐거운 시간과 6개월쯤의 지지부진한 해체의 시간을 겪었다. 그러고 나서는 인터넷으로 낯선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1년이 좀 넘는 기간 동안 무려 다섯 개의 모임에 가입해서 월화수목금을 채워가고 있다.   대부분 운영자에게 회비를 내고 참석하는 모임이다. 내가 힘들어했던 모임 운영의 수고를, 적은 액수의 회비로 간편히 떠넘기게 되어 그런 걸까? 이제는 별 괴로운 일 없이 즐거운 모임 생활을 하고 있다...
2002년의 열광과 공동체의 희생양 나는 원래 아웃사이더 성향이 강한 사람이긴 하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도, 전사회적으로 왕따가 되는 건 특별한 경험일수밖에 없다. 2002년의 한국-일본 월드컵 개최 때 말이다. 지금이야 오랜 세월이 지난 후니까, 그때 자기도 왕따였노라며 함께 울분을 토하게 된 사람들도 가끔 만났지만, 그때의 난 철저히 혼자였다. 사회 전체에서 내쳐진 듯한 느낌이 팔뚝의 피부 위로 스멀스멀 기어다니던 감각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는 두 번째 직장(steemit.com/kr/@uchatn/1-dot-com-bubble-i-am-in)에 다니고 있었는데, 나처럼 반골 기질이 상당하던 동료들도 처음에는 월드컵 같은 민족주의적 스포츠 행사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행사일이 가까워지고 본선 경기가 ..
대학 선거 운동 대학에는 총학생회장이라는 직책이 있다. 학과 학생회장과 단과대학 학생회장 동아리 연합회장 등, 참 학생들에게는 자치 조직이 있고 그 조직에는 꼭 수장과 함께 집행부라는 임원들이 있는 것이다. 하긴뭐 초등학교에도 반장을 넘어 학생회장은 있었고 그걸 맡은 남자아이가 얼마나 으스댔는지는 기억에 선명하게 떠오르니까 말이다. 암튼 웃긴다, 어른 흉내 같다, 같잖다는 인상이, 어린 나에게는 있었더랬다.   대학 선배에게 이번 학생회장 선거 운동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을 때도 그랬다. 하지만 참여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 그런 인상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건 바로 정파 문제였다. 당시 대학생 운동은 두 개의 정파로 나뉘어 꽤 심각한 대립을 하고 있었고,..
불면증, 걷기, 시골 개들 2019-10-29 11:05:11 올해 제주 여행을 자주 가게 됐다. 대부분 동반자가 있었고 제주에 사는 친구와 같이 다닐 때도 많아서, 혼자 다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는 숙소 주변 산책은 주로 혼자 즐기게 됐다. 나지막한 돌담과 수풀이 자라는 나대지(노는 땅)와 저 아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마을 풍경은 오후에 주로 방문하는 어느 관광지 못지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동네 개들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가? 유난히 사나운 표정으로 짖어대며 따라오는 통에, 별로 개를 무서워하지 않는 편인 나도 위협을 느끼며 후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얘기를 제주 사는 친구에게 했더니 혼자 다녀서 그렇다고 했다. “개는 기본적으로 무리 동물이니까 혼자 다니면 업신여긴다고.” 좀 의아하..
조직의 동원령과 딴짓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인간이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혼자 애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꽤 많은 경우, 사람을 모아야 한다. 혼자는 너무 허약하니까, 여럿의 힘을 모아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이루려고 할 때는 조직이 생기고 위계가 생겨서, 할 일을 배분한다. 그러다 보면 ‘큰 목표’를 위해서 이뤄야 하는 작은 목표, 즉 일거리들이 생기는데, ‘큰 목표’에는 다들 동의해서 모였더라도, 떠맡은 일거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생긴다. 대학 때 학생 운동을 할 때도 그랬다. 그렇다고 내가 주도적으로 참여한 건 아니고, 90년대에 대학생이 되었으니 적어도 운동권 경험은 해보고 싶었다. 그 당시엔 그게 대학 생활의 찐경험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하부 조직쯤..
낯선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 나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모임을 찾아나선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게 되는 ‘글쓰기’ 모임을 말이다.   활발히 사교 활동을 하던 2-30 때조차도 인맥이 닿지 않는 모임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한창 인터넷 문화가 폭발을 해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익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더욱 쉬워졌을 때도 나의 모임은 늘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통해 오프라인에서만 이루어졌다.   처음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 것도 ‘친구의 친구의 친구’와 일로 만나 친해지면서, 거기에 나의 친구 한 명과 친구의 친구 두 명을 끌어들여 다섯이 모여서였다. 낯선 사람도 있었지만, 대충의 정보는 미리 공유한 후였다.   1년 정도 지속되던 그 모임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러면서도 글쓰기 모임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커..
고전적인 위계와 권력의 남용 대학에 들어가서, 비평을 공부하는 모임과 언어학을 공부하는 모임은 냉큼 들어갔지만 ‘고전’을 공부하는 모임에는 좀 미적거리다가 들어갔다. 두 개의 모임도 벅찬데 세 개나? 그래도 공부 해보고 싶긴 한데? 에라 모르겠다, 이왕 하는 김에 3관왕을 하지 뭐. 하는 심정으로 들어가긴 했다. 가보니, 고전 모임은 나쁘지 않았다. 비평 모임처럼 끈끈하지도, 언어학 모임처럼 쿨하지도 않고, 딱 그 중간 분위기의 소박하고 고졸한 맛이 있어서, 가면 마음이 편했다. 선배들도 꽤 다정하게 챙겨주면서도, 전혀 강압적이지는 않은 분위기여서 감사했다. 딱 한 경우만 제외하고. 한 남자 선배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남자 동기가 있었다. 그 또래 남자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약간 덜떨어진 그 남자 동기를, “내 고등학교 후배, 내 ..
언어학 스터디와 서로 다른 사회 참여형 엉겁결에 국문과에 들어오긴 했지만,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 되리라는 생각은 차마 못하고 있었다. 책읽기를 좋아하니 공부는 재밌겠다 싶었지만 백일장 같은 데서 상을 탄 적도 없었으니까. 난 늘 사생대회 파였다.   국문과에 모인 아이들은 당연히 시인, 소설가 지망생이 많았고 그런 녀석들이 주로 수업이나 학과 활동에 앞장서고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나 학생회 구성 때부터 시창작모임이나 소설창작모임 구성원들 목소리가 서로 질세라 제일 시끄러웠다.   하지만 학우들 중에는 나처럼 글쓰기에 자신 없는 사람이 꽤 많았고, 실제 우리 학과의 정식 명칭은 ‘국어국문학과’였다. 일반적인 인식이 어쨌거나, 명칭에 있어서는 ‘문학’보다 ‘어학’이 먼저였던거다. ‘문학’에 자신없는 아이들은 작가 지망생들을 부러운 눈으로 곁눈..
언더티와 주사파, 기득권의 분노 맥 빠진 비평 학회에서 좌충우돌 하던 차에 본격 운동권 조직의 선배들로부터 비밀 모임 제안을 받았다. 언더티(under table)라는 이상한 명칭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다. 모임에 가보니, 나와 비슷한, ‘의식화’ 수준이 중급 정도 되는 과동기 다섯과, 그에 걸맞은 선배 둘로, 나름 꽤 영악하게 모임을 조직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좀더 어려운 정치경제학 서적을 읽게 되었다. 우리들은 비로소 격렬한 토론도 하며 기존의 관념과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운동권 내 다른 정파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싶었다. 사실 주사파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찾아갔다. 비평 학회장을 맡고 있던 선배가 주사파여서 그 선배를 찾아갔다. 그리고 현재 ..
비평 학회 파격기 파격적이고 속물적인 꼬심의 말에 후배들이 대거 들어와서 뿌듯했지만, 한 가지 예상 못한 점이 있었다. 파격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적이고 관습적인 조직 운영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꽤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1학년 때 받아들었던 비평 모임의 교재(커리)는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춘 체제 비판 서적 및 맑스주의 문학입문서들이었다. 벌써 몇 년째 같은 책들로 세미나를 해왔다고 했다. 단계를 밟아가는 재미와 충격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학생이나 됐는데 아직도 이런 유치한 문체의 책을 읽어야 하는지 맥이 빠졌다. 그렇게 2학년이 되고 후배들을 맞자, 나는 선배들에게 우겼다. 내가 커리큘럼을 짜겠다고.   우선 제일 어려운 정치경제학 입문서를 1-2주에 독파하도록 하고, 당시..
대학생들의 학회 혹은 운동권 예비 모임 내 생에 최초의 스터디 모임에 대한 글은 이미 다른 블로그(blog.naver.com/uchatn/221197079913)에 썼다. 그 다음으로 몸담았던 스터디 모임은 뭐였더라 생각해보니, 어쩔 수 없이 대학교 때 학회 이야기를 써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가장 오래한(4년 6개월) 모임이었다. 반장도 해본 적 없는 내가 처음으로 리더가 되었던 모임이기도 했다.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했고 미숙했지만, 모임의 목적 자체는 내 성격과 경력의 핵심을 쭉 이루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는 인문계 대학에 들어가면 스터디 모임에 가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학생이 되면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에 더욱 가까워지고, 우리 때는 특히나 교수들에게서는 배울 게 없었다. 내가 국문학과에 들어가서 ..
누드 크로키 모임 사목모 2021. 8. 30.예전에 그림 그리기 동아리에 가입했을 때, 거기서 일주일에 한 번 누드 크로키 멤버를 모집했다. 대학생이 되어 온갖 다양한 활동들을 폭발적으로 시작한 시기였지만 ‘누드’ 크로키라니, 그런 게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 나는 뭔지 정확히 알아보지도 않고 바로 신청했다. 알고 보니 누드 크로키란 벌거벗은 (여자) 모델을 방 가운데 두고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에워싼 채 빠르게 그림을 그려 나가는 모임이었다. 모델이 한 가지 자세를 취하는 시간은 꽤 짧았다. 길어야 30초. 아무리 연필 스케치라고 해도 겨우 30초 동안 어떻게 그림을 그리나 싶었지만, 정지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모델료가 올라간다던가. 더구나 우리 같은 아마추어 동호회로서는 굳이 시간이 길어지면 ‘잘’ 그려야 하는 부..
낯선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 나서다 아무 연고도 없는 모임을 찾아나선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드러내게 되는 ‘글쓰기’ 모임을 말이다.   활발히 사교 활동을 하던 2-30 때조차도 인맥이 닿지 않는 모임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한창 인터넷 문화가 폭발을 해서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익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일이 더욱 쉬워졌을 때도 나의 모임은 늘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통해 오프라인에서만 이루어졌다.   처음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 것도 ‘친구의 친구의 친구’와 일로 만나 친해지면서, 거기에 나의 친구 한 명과 친구의 친구 두 명을 끌어들여 다섯이 모여서였다. 낯선 사람도 있었지만, 대충의 정보는 미리 공유한 후였다.   1년 정도 지속되던 그 모임이 점차 힘을 잃어가고, 그러면서도 글쓰기 모임에 대한 욕구가 점점 더 커..
그림 그리기 여행 대신 집단 심리 치료 2 근데 유독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애 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얼굴도 예쁘장한 애가 초반부터 불행했던 가족사와 자신의 우울증, 자살 경력을 소리 높여 호소하며 모두의 동정을 끌었다. 다들 힘들었겠다, 불쌍하다, 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될 거다 하면서 관심을 보여주고 덕담을 건넸다. 내가 보기엔 그저 관심 받으려고 온갖 과장을 하며 저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날카로워지며 슬슬 그녀에 대한 공격의 질문을 벼려가는데, 갑자기 그때까지 거의 말이 없던 심리학과 교수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잠깐!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지금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심리학과 교수는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00씨를 미워하지? 뭔가 아주 밉살스..
그림 그리기 여행 대신 집단 심리 치료 1 부모는 내가 심리학과에 가기를 원했다. 내가 사춘기 때 부모와 갈등이 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왠지 나의 부모는 나와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부 갈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인간 관계의 갈등을 심리학이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심리학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반감 먼저 들었다. 게다가 한창 젊고 혈기왕성했던 나이라서, 정치경제학이나 사회학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동경했다. 결국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학과를 선택하는 문제가 지나가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나와 부모의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귀가 시간, 술 마시는 문제, 잦은 엠티, 읽는 책의 종류...   그러다가 여름이 되었다. 나는 당시 활동하고 있던 그림 그리는 써클에서 ..
그림 동아리 활동기 2 학기초와 달리 여기저기에 이젤을 세운 신입생들의 열기가 유입되며 드디어 동아리방이 ‘화실’ 즉 그림 그리는 작업실 같은 모습을 띠어 갔다.   그런 한편 화실 정중앙 ㄷ자 소파에서 복학생들의 카드 게임은 계속되었다. 저녁 늦게까지 남아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패들과는 달리 카드패들의 열기는 밤이 깊을수록 달아올랐다. 문득 돌아보면 소파 위로 만원짜리 수십장이 날라다녀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카드패 선배들은 점심시간에 찾아온 신입생들에게 밥을 사주며 소파값을 다했다. 카드에서 딴 사람이 점심값을 내기로 했던 걸까?   후배들에게 밥 사주는 여자선배는 딱 한 명 있었다. 경제적 여유도 있는 집 딸이었는지, 조용히 앉아 있다가 비싸 보이는 지갑을 들고 벌떡 일어서며 강단있게 “밥 먹으러 가자!..
그림 동아리 입문기 1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그림 그리는 동아리에 들어간 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주 잘 하지는 못했다. 못 그리는 편은 아니라도, 적어도 그림으로 대학을 가고 직업까지 구하기엔 무리가 있는 솜씨였다. 그래도 평생 취미로 삼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대학생이 되면 꼭 그림 그리는 동아리에 들어가 거기서 멋진 친구도 사귀고 멋진 취미 생활도 하겠다고 결심했더랬다.   물어물어, 학내 유일한 그림 동아리에 찾아갔다. 학년초, 신입생을 유치하려고 열심인 다른 동아리들과 달리, 그림 동아리는 그 흔한 신입생 모집 부스 하나 차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부푼 기대를 안고 제발로 동아리방을 찾아오는 신입생이 넘쳐났다.   처음 동아리방, 이른바 ..
불발의 시위와 파랑새 그러고 보니 고2 때도 그런 모임 비슷한 게 있었다. 우리에게 젊은 역사학도 담임이 배정되었다. 수업 시간 중에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하거나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은 수업 내용에 자연히 배어나왔고 우리는 그를 흠모하며 물이 좀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학교 ‘당국’이 봄 축제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다들 시, 그림, 음악 등 특별활동에 참여하며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별로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축제를 취소한다니, 아이들은 화가 났다. 그러다가 강당에 모여 항의를 하자는 말이 나왔다. 우리 반부터 들썩이더니 어느 순간, 전교생의 절반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우르르 점심시간에 강당으로 몰려갔다. 개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일이야? 어디가?” “몰라, 다들 강..
천주교와 진화 생물학 열혈 천주교 신자인 부모님 덕에 나는 유아 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종교 활동에 푹 빠져 자랐다. 일요일 오전 미사뿐 아니라 오후의 주일학교, 평일에도 삼시세끼 기도와 저녁 기도 모임, 성당 친구, 성당 여행, 각종 행사 등으로 왁자하고 (성스럽고) 바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참고 https://travelnvisit.tistory.com/m/29)       그러다가 슬슬 머리가 굵어지는 사춘기가 되면서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마침 그맘때 성당에서는 일종의 성인식인 '견진성사'라는 의례를 치른다. 꽤 긴 기간 동안 수업을 듣고 나서 다함께 축복을 받는 자리(미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짧으나마 신부와의 개별 면담 자리도 있었다. 개신교와 달리 천주교에서 일반 신자..
유년기에만 골목 대장 유년기에만 골목 대장     글쓰기 모임의 리더가 오랜 여행을 떠나며 우리와 이별하게 된 기념으로 공동의 주제글을 써보자는 말이 나왔다. 우정이라는 주제로. 어린 시절 친구 얘기를 쓴 사람도 있고, 썸 타던 이성친구가 여행을 떠나며 이별하게 된 이야기를 쓴 사람도 있고, 원래 쓰던 소설에 슬쩍 친구 캐릭터를 끼워 넣은 사람도 있었다. 나도 그 동안 혼자서 친구에 대한 글을 몇 편 써본 적이 있다. 다만, 송별 기념으로 쓰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는 좀 망설여졌다. 이야기가 좀 어둡게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에 더욱. 하긴 뭐 내 글이 안 어두운 게 있겠냐마는. 어두운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어쨌든 그래서, 차라리 좀 더 목적이 뚜렷하고 거리감이 있는 인간관계, 특히 이 글쓰기 모임에..
글쓰기 자조 모임을 시작하다 아직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지 네 달이 됐을 때, 아래와 같은 글을 썼다.   십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건강도 너무 안 좋아지고 조직 생활에, 인간관계에 지쳐 다 그만 두기로 했다. 실은 그 동안 조금씩 외주편집과 번역 등 일감을 찾으며, 프리랜서로 살 준비를 했었다.   그러고 나서 십년을 출판 번역가로, 두문불출 살았다. 한 달에 한두 번 편집자를 만나거나 친구를 만나는 이외에, 술도 안 마시고 매끼를 건강식으로 해먹으며 책을 읽고 운동을 하며 보냈다.   물론 번역가로 사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돈을 안 주는 출판사나, 아예 책 출간 자체가 취소되는 경우도 있었고, 이런저런 괴로움들이 있었지만, 처음 맞이하는 혼자만의 삶과 자유는 정말 평화로웠다. 누구는 안빈낙도라고 표현하기도.   아무튼 십..
골목길의 노올자 모임은 놀이에서 시작된다. 특히나 어린이가 처음 스스로 시작하는 모임은 그렇다. 그 순간을 정의 내리는 문장도 있다. “누구누구야 노올자!” 골목길이라는 걸 보기 힘들어진 지금은 저 외침을 못 들은지 꽤 됐다. 요즘이야 친구랑 놀려면 엄마에게 말하거나 해서 전화로 연락하고, 심지어 미리 예약해야 하는 경우가 많겠지만, 나 어릴적 어린이들은 심심해지면 무작정 친구의 집앞으로 가서 외쳐 불렀다. “누구야 노올자!” 처음에는 조그맣게 부르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누구누구야 노올자!” 목놓아 외쳐불렀다.  그러다 보면 친구는 집에 없고 친구의 어머니가 대신 나와서 대답하기도 했다. “누구 없다.” “어디 갔는데여?” “누구 어디 놀러 나갔다.” 그럼 노올자를 외쳐 부르던 어린이는 너무 쓸쓸해진다. 나를 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