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유독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애 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얼굴도 예쁘장한 애가 초반부터 불행했던 가족사와 자신의 우울증, 자살 경력을 소리 높여 호소하며 모두의 동정을 끌었다. 다들 힘들었겠다, 불쌍하다, 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다, 잘 될 거다 하면서 관심을 보여주고 덕담을 건넸다. 내가 보기엔 그저 관심 받으려고 온갖 과장을 하며 저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날카로워지며 슬슬 그녀에 대한 공격의 질문을 벼려가는데, 갑자기 그때까지 거의 말이 없던 심리학과 교수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잠깐!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지금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심리학과 교수는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00씨를 미워하지? 뭔가 아주 밉살스럽나봐… 혹시 00씨가 누구 닮지 않았어요? 여동생이라든가...”
한창 진행중이던 대화 주제에서 벗어난 뜬금없는 개입이었다. 게다가 별 의미 없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불시에 일격을 당한 사람처럼 멍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두 눈에서 수도꼭지가 터진 것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닦아내고 멈추려 했지만 더 심하게 울음이 나왔고 나는 급기야 그 자리에 엎어져 한참 대성통곡을 했다.
다들 말이 없는 와중에 교수만 이따금씩, “괜찮아, 그런 거지..” 하면서 꽤 열심히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것도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 겨우 울음을 그치고 고개를 들어보니, 그 얄미운 여자애가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나는 ‘아, 결국 이런 데 와서, (심리적) 봉변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그러고 나서 식사 시간에, 교수는 변명인지 뭔지 모를 묘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자기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내가 무슨 벽장 같은 걸 확 열어젖히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안 돼, 그러지 마!” 하면서 붙잡으려다가 잠에서 깨어났단다.
참나, 내가 무슨 건드려선 안 될 인간 심리의 깊숙한 곳이라도 침범하려 했다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튼 칭찬인지 비판인지 알 수 없는 그 이야기를 나는 ‘경고’로 받아들였고, 남은 프로그램 내내 최대한 몸을 사리며 말을 아꼈다. 열흘간의 캠프가 끝나고 다들 헤어지는 순간 그 교수는 나를 유난히 꼭 끌어안으며 수고 많았다고 다독여주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던 나의 아버지는 그 대학 심리학과 대학원에 입학 시험을 본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가 지도교수를 맡게 될 예정이었다. 그러면서 몇 번의 상담을 거쳐, 아버지에게 사이가 좋지 않은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번 캠프를 권했던 거였다. 지도교수가 될 사람의 제안을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나에 대해 뭘 좀 알고 있는 것 같더라니.
몇 년의 세월이 흘러 나도 문학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수업 중에 프로이트를 (문학적으로) 읽는 세미나가 있었는데, 교수와 동급생들과 토론을 하던 중에 갑자기 내가 불쑥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저는 무의식이 없는 사람 같아요.” 물론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소리였지만, 맥락이나 발상이 파격적인 데가 있어서 다들 두고두고 ‘충격 발언’이라며 나의 ‘무의식 없는 사람 선언’을 화제로 삼았더랬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와중에도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투명한 사람이 아니며, 실은 내 안의 거대한 무의식이 늘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무의식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정확하게는, ‘나는 한 번 무의식이 까발려진 적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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