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초와 달리 여기저기에 이젤을 세운 신입생들의 열기가 유입되며 드디어 동아리방이 ‘화실’ 즉 그림 그리는 작업실 같은 모습을 띠어 갔다.
그런 한편 화실 정중앙 ㄷ자 소파에서 복학생들의 카드 게임은 계속되었다. 저녁 늦게까지 남아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림패들과는 달리 카드패들의 열기는 밤이 깊을수록 달아올랐다. 문득 돌아보면 소파 위로 만원짜리 수십장이 날라다녀 깜짝 놀랄 때가 있었다.
그래도 카드패 선배들은 점심시간에 찾아온 신입생들에게 밥을 사주며 소파값을 다했다. 카드에서 딴 사람이 점심값을 내기로 했던 걸까?
후배들에게 밥 사주는 여자선배는 딱 한 명 있었다. 경제적 여유도 있는 집 딸이었는지, 조용히 앉아 있다가 비싸 보이는 지갑을 들고 벌떡 일어서며 강단있게 “밥 먹으러 가자!” 하고 대여섯 명의 신입생들을 몰고 나가는 그녀가 너무 멋있게 보여, 난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리라 결심을 했다.
평소에는 바빠 보이기도 하고 주위에 몰려든 후배도 많아서 좀처럼 내 차지가 되기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다가 엠티를 가게 되었는데, 난 그날 밤을 활용하리라 결심했다. 낮동안에는 정신 없겠지만 밤이 되어 좀 조용해지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옆으로 가서 버티리라.
엠티날 아침, 그녀는 늘 수수하던 평소답지 않게 엄청 꾸미고 왔다. 무슨 알프스 소녀 하이디도 아니고, 머리를 양갈래로 땋았는데, 색색의 리본을 넣어서 희한한 모양으로 늘어뜨렸던 것이다. 옷차림과 악세사리도, 범상치 않았다.
어쨌거나 낮동안은 그냥 내버려두고,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데서도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아까까지 궂은일을 혼자 도맡으며 왔다갔다 하더니 대체 갑자기 어디를 간 걸까 의아해하다가, 다른 여자선배(언니2)에게 그 여자선배(언니1)의 행방을 물었다.
여기서 잠시 다른 여자 선배, 즉 언니2의 얘기로 약간 새자면, 약간 못생긴 편이었던 언니1과 달리 언니2는 그야말로 엄청난 미인에 찬바람이 쌩쌩 불어 신입생들은 감히 언니2와는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언니1과는 오래전 연락이 두절된 반면 언니2에게서는 아직까지 드문드문 소식을 듣고 있으니,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언니1을 찾아헤매다가 다급해진 나는 우연히 마주친 언니2에게 언니1의 행방을 물었다. 평소 인상처럼 대꾸도 안 하고 무시할 줄 알았는데 언니2는 의외로 가던 길을 멈추고 나에게 잠시 온전한 관심을 주었다. 그리고 피식 웃더니 고개를 멀리 하늘의 별로 돌렸다. “아… 걔? 걔는 지금쯤 그 오빠랑…”
그제서야 나는 뭔가 퍼뜩 깨달을 듯했다. 유난히 언니1의 주위를 맴돌던 남자선배가 있었다. 실은 그 남자는 저번에 내가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후배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비난에 가까운 조언 한 마디만 남기고 가버린, 그래도 자기 그림은 열심히 그리는 것 같던 독불장군 선배였다. “사진 보고 그리지 마라. 그 이유는 내가 다음에 얘기해줄게.” 그럼 정물화만 그리라는 건가? 다들 사진을 보며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데 왜 저러지? 게다가 그에게 ‘다음’이란 건 없었다.
엠티 다음날 아침, 언니1은 밤을 꼴딱 세운 듯한, 그러나 사랑에 빠진 자 특유의 피곤한 생생함을 띠고 어디선가 나타났고, 자고 일어난 나는 그녀를 원망스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다같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기차 안에서의 시간만이라도 그녀와 같이 있고 싶어 근처를 서성거리는 나는 본체만체, 그 남자선배가 그녀 옆에 꼭 붙어 있었다. 그리고 학교 앞에서 다같이 기차를 내리지 말고 자기랑 같이 그 전 역에서 내리자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있었다. 자기네 둘은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그 역에서 갈아타는 게 좋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거의 애걸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나는 그만 자리를 피해 주었다.
나중에 몇달인지 몇년인지 지나서, 언니1에게 예전에 신입생들에게 왜 그렇게 밥을 열심히 사주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남자들만 밥을 사는 게 너무 안 좋아 보여서.”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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