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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그림 그리기 여행 대신 집단 심리 치료 1

 

부모는 내가 심리학과에 가기를 원했다. 내가 사춘기 때 부모와 갈등이 심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왠지 나의 부모는 나와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부 갈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인간 관계의 갈등을 심리학이 풀어줄 수 있지 않을까 희망했던 것 같다.

 

물론 나도 심리학에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반감 먼저 들었다. 게다가 한창 젊고 혈기왕성했던 나이라서, 정치경제학이나 사회학이 더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동경했다. 결국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학과를 선택하는 문제가 지나가고,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나와 부모의 갈등은 끊이질 않았다. 귀가 시간, 술 마시는 문제, 잦은 엠티, 읽는 책의 종류...

 

그러다가 여름이 되었다. 나는 당시 활동하고 있던 그림 그리는 써클에서 제주도로 열흘 동안 여행을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나의 아버지는 묘한 제안을 했다.

 

그림 써클의 여름 여행 전에, 열흘 동안의 집단 심리 치료 캠프를 다녀오면 허락해 주겠다는 거였다. 시골의 어느 시설에 가서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랑 열흘 동안이나 처박혀 있어야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대학교 1학년생이 여름에 동아리에서 단체 국내 여행을 가겠다는 데 허락을 안해주는 부모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일 테지만, 허락을 안해준 건 아니니, 할 말이 없었다. 더구나 그 프로그램은 어느 대학 심리학과에서 주관하는 거였고 참가비도 꽤 비쌌다. 어찌 보면 열흘간의 감옥행이나 다름 없는 제안이었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권하는 부모의 심정도 이해가 갔고 또 호기심도 어느 정도 생겼다.

 

그 대학이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곳이었기에, 프로그램 장소는 시골의 어느 수도원이었다. 심리학과 교수 한 명이 멘토로 참가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열 명의 사람이 모였다. 내 또래 스무살 여자애도 있었고 노년의 남성은 물론, 심지어 원불교 교무라는 중년 여성도 있었다.

 

첫날부터 우리는 무작정 어느 방 안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아무런 지시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 프로그램은 열 명이서 그렇게 앉아 있다가 답답하고 지루하니 누구라도 입을 열어 아무 말이나 시작하면 대화와 토론이 시작되는, 그런 모임이었다.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잠깐씩 쉬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에 열 시간이 넘게 둥그렇게 둘러 앉아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난상토론에 끼어들든지, 토론을 지켜보아야 했다.

 

물론 심리학과 교수가 중간중간 대화의 방향을 잡아주긴 했지만, 개입은 정말 최소한으로 이루어졌고, 우리는 서로 쓸데없는 입씨름도 했다가, 상담과 조언도 해주었다가, 심지어 돌아가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나는 대체로 입을 뿌루퉁하게 내밀고 난 여기에 아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가했으며 당신들과 별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태도로 가만히 앉아 있으려 했지만, 워낙 혈기왕성한 나이였다보니, 잘난척하며 다른 사람의 말에 이리저리 끼어들지 않기가 힘들었다.

 

PS. 사진은 집단심리치료캠프를 다녀와서 드디어 갔다온 그림그리기여행. 하지만 그때 기억은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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