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목모 2021. 8. 30.
예전에 그림 그리기 동아리에 가입했을 때, 거기서 일주일에 한 번 누드 크로키 멤버를 모집했다. 대학생이 되어 온갖 다양한 활동들을 폭발적으로 시작한 시기였지만 ‘누드’ 크로키라니, 그런 게 있는 줄도 처음 알았다. 나는 뭔지 정확히 알아보지도 않고 바로 신청했다. 알고 보니 누드 크로키란 벌거벗은 (여자) 모델을 방 가운데 두고 십 수 명의 사람들이 에워싼 채 빠르게 그림을 그려 나가는 모임이었다.
모델이 한 가지 자세를 취하는 시간은 꽤 짧았다. 길어야 30초. 아무리 연필 스케치라고 해도 겨우 30초 동안 어떻게 그림을 그리나 싶었지만, 정지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모델료가 올라간다던가. 더구나 우리 같은 아마추어 동호회로서는 굳이 시간이 길어지면 ‘잘’ 그려야 하는 부담도 올라가기 때문에 차라리 시간이 짧은 편이 부담이 없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나랑 함께 간 동아리 선배들을 보니, 이건 거의 그림이랄 수도 없는 수준으로 마구 휘갈겨진 선 몇 개가 꽤 큰 스케치북에 켜켜이 남겨지고 있었다.
아마 홍대 부근의 어느 화실이었던 것 같다. 대학생으로서는 꽤 부담스러운 회비를 내고 선배들을 따라 누드 크로키 장소로 갔다. 누가 주최한 모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대학의 미술과 학생이나 동아리 회원들이 섞여 있는 듯했고 젊은이뿐 아니라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보였다. 취미 화가인지 직업 미술가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방 가운데에는 약간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은 몸으로 연단 비슷한 단상에 의자 한 개와 함께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무표정으로 꽤 멋진 포즈들을 연달아 취해 나갔다.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비스듬히 눕기도 하는 포즈들을 취하면서 그녀는, 일부러라고 할 만큼 몸을 사리지 않아서, 신체의 여러 부위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금도 아침에 뻗친 머리칼처럼 일부가 내내 약간 위쪽을 향하고 있던 그녀의 음부 털 모양이 기억에 선명하다.
나와 함께 간 동아리 선배들은 꽤 의젓한 표정으로 그녀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며 마구 손을 놀려 그림을 그렸다. 신입생이었던 나의 동기 남학생들은 얼굴이 벌개져 시선을 잘 못 맞출 거라 예상해 보았지만, 그들도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모델을 정면 응시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늘 공중 목욕탕에서 타인인 여성의 벗은 몸을 볼 기회가 있지만, 만일 모델이 남자였다면 나는 지금쯤 머릿속이 온갖 생각으로 들끓을 테고,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 같은데 말이다.
여기 참석한 남자들 중에 ‘진짜’ 예술적인 목적으로 이 누드 크로키 모임에 참석한 경우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사실 나 자신조차도 순수한 생각으로 여기에 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미술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사람의 나체를 그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가 그리고 싶은 소재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나는 누드 크로키 모임에 가보고 싶었고 거기서 모델로 서 있는 여자를, 그녀를 그리는 사람들의 표정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꽤 순수한 호기심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누드 크로키 모임에 몇 번 참석했는지는 기억 나지 않지만, 그때 가져갔던 대형 스케치북 몇 권은 아직 가지고 있다 한 시간 정도만 참석했어도 열심히만 그리면 120장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어버버거렸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30초 동안 최선을 다해 종이 위에 꼴을 갖춰보려 노력했고 그 시간을 마칠 쯤에는 꽤 그럴 듯한 작품들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다른 것들을, 훨씬 오랜 시간을 들여 그릴 때보다 훨씬 멋진 그림이 나왔다. 순전히 인체의 힘, 모델의 힘이었다. 그냥 선 몇 개만 따라 그어도, 그림에는 뭔가 아우라가,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나뿐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의 결과물도 그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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