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이고 속물적인 꼬심의 말에 후배들이 대거 들어와서 뿌듯했지만, 한 가지 예상 못한 점이 있었다. 파격은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계적이고 관습적인 조직 운영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꽤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1학년 때 받아들었던 비평 모임의 교재(커리)는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춘 체제 비판 서적 및 맑스주의 문학입문서들이었다. 벌써 몇 년째 같은 책들로 세미나를 해왔다고 했다. 단계를 밟아가는 재미와 충격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학생이나 됐는데 아직도 이런 유치한 문체의 책을 읽어야 하는지 맥이 빠졌다. 그렇게 2학년이 되고 후배들을 맞자, 나는 선배들에게 우겼다. 내가 커리큘럼을 짜겠다고.
우선 제일 어려운 정치경제학 입문서를 1-2주에 독파하도록 하고, 당시 가장 논쟁이 되던 비평 논문과 최신 유행 문학 작품을 매주 교재로 채택해 무조건 읽어오고 발제를 하게 했다. 하지만 “인맥 쌓는 모임”이라는 말에 당연히 아무 생각 없이 속물적 기대를 안고 들어왔던 후배들은, 본격적인 공부를 할 생각도, 세상을 (변혁시키기는커녕) 조금이라도 다르게 바라보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도 당시 젊은이들 사이 새로운 성경으로 떠오르고 있던 왕가위 영화, 하루키의 소설,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알려주며 이어간 뒤풀이 술자리의 분위기는 좋~았다. 후배들은 점점 세미나 시간에는 빠지고, 뒤풀이 때만 나타나기 시작했다. 감상적으로 대취하고 서로 연애질로 풍파를 일으키다가 1년도 안 돼 모두 제 갈 길로 흩어졌다.
학회가 거의 끝장나기 직전, 억지로 갔던 여행이 기억난다. 후배들은 이미 학회에서의 인간관계에 신물이 나 있는 상태였지만, 마음이 여려 거절을 잘 못하는, 혹은 미안한 마음이 남아 있는 양심적인 아이들이 있어, 몇 명을 잡아끌고 바닷가로 갔다. 습하고 더웠던 그해 서해 바다엔 유난히 파리가 많이 끓었고 갓 스물 된 젊은이들은 볼 장 다 본 노인들처럼 말없이 늘어져 있다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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