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빠진 비평 학회에서 좌충우돌 하던 차에 본격 운동권 조직의 선배들로부터 비밀 모임 제안을 받았다. 언더티(under table)라는 이상한 명칭이었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했다. 모임에 가보니, 나와 비슷한, ‘의식화’ 수준이 중급 정도 되는 과동기 다섯과, 그에 걸맞은 선배 둘로, 나름 꽤 영악하게 모임을 조직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좀더 어려운 정치경제학 서적을 읽게 되었다. 우리들은 비로소 격렬한 토론도 하며 기존의 관념과 세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내친 김에 운동권 내 다른 정파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싶었다. 사실 주사파에서는 아무도 나에게 연락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찾아갔다. 비평 학회장을 맡고 있던 선배가 주사파여서 그 선배를 찾아갔다. 그리고 현재 맑시즘 공부를 하고 있으니(말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깼다) 주체사상도 공부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그녀는 난색을 표하며, 너한테는 무리라고, 지금 하고 있는 비평 학회에서 초보자 공부나 잘 하라고 말했다. 나는 한참을 졸라서 겨우 허락을 받아냈다. 다음 주부터 둘이 만나 책 한 권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처음 주사파 서적을 읽고 엄청나게 화가 났다. 맑스주의 책을 읽으면서도 좀 화가 났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혼자 책을 읽으며 속을 부글부글 끓였고 선배를 만나서는 씩씩대며 마구 화를 퍼부었다. 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냐는 분노였던 것 같다.
책이 넌센스라면 비웃으면 그만이지 왜 화를 냈는가?
아마도 내 지식으로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라면 수긍하면 되지?
그러려면 20평생 살아온 사회를 완전히 부정해야 했다.
미제의 식민지이자 악랄한 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말이다.
고작 스무 해를 살아온 사회, 그것도 젊은 혈기로 몹시 비판하고 싶던 사회가 부정당하는 것에도 엄청난 분노가 이는데, 40평생, 60평생 살아왔던 사회가 깡그리 비판당하고 뒤집혀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기분이 어떨까?
선배는 주체사상 책을 그만 읽자고, 고등학생 눈높이에 맞춘 사회 비판 서적이나 계속 읽어나가자고 나를 타일렀다. 나는 아무 말 못했다. 저 끔찍한 책을 다시 들여다보기가 두려웠다. 그렇게 모임을 정리하고 나서 선배는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가 듣는 앞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나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녁 밥 주실 거예요?” 수화기 너머 대답을 듣고 그녀는 행복하게 히히 웃었다.
실은 아무래도 최근에, 비슷한 일을 다시 겪은 것 같다. 이번에는 40이 훌쩍 넘은 내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라는 책을 여기저기 권하고 다녔다. 이 책이 설파하는 기본 소득과 대안 사회에 대해 들은 친구들은 엄청나게 화를 내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별로 과격한 책도 아니고, 이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이 책에 동의해야 하는, 진보적이고 열린 생각을 가진 중년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들은 결국, 이 체제에서 살아남고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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