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고2 때도 그런 모임 비슷한 게 있었다. 우리에게 젊은 역사학도 담임이 배정되었다. 수업 시간 중에 사회에 대한 발언을 하거나 그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의 생각은 수업 내용에 자연히 배어나왔고 우리는 그를 흠모하며 물이 좀 들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학교 ‘당국’이 봄 축제를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다들 시, 그림, 음악 등 특별활동에 참여하며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별로 타당하지 않은 이유로 축제를 취소한다니, 아이들은 화가 났다. 그러다가 강당에 모여 항의를 하자는 말이 나왔다. 우리 반부터 들썩이더니 어느 순간, 전교생의 절반은 되어 보이는 인원이 우르르 점심시간에 강당으로 몰려갔다. 개중에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일이야? 어디가?” “몰라, 다들 강당으로 모이래.” 해서 간 아이들도 태반이었다.
아이들이 강당에 모여 두리번, 웅성거리고 있을 때 교감이 화난 얼굴로 단상 위로 올라왔다. 늘 학교 운동장에서 자신의 흰색 코란도를 온 정성 다해 세차하던 남자였다. 그는 우리에게 당장 교실로 돌아가라고 말했고 우리는 조금 더 웅성거리다가 몇 분 지나지 않아 모두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주동자 색출 작업이 시작되었다. 반장과 부반장들을 대형 회의실 한쪽에 일렬로 세워놓고 주동자가 누군지 말할 때까지 계속 서 있게 했다. 선뜻 나서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누가 주도해서 모인 게 아니었고, 더구나 제대로 모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건이랄 게 없는 사건임에도 본보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워먹은 걸까?
밤이 늦자 부모들이 학교로 찾아왔지만 교감은 아이들을 집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자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눈물지으며, 걔중 눈에 띄는 외모에 목소리가 컸던 한 아이를 지목하기 시작했다. 그 아이를 지목했던 소녀들은 지금 어떤 어른이 되었을까?
우리 반이었던 그 아이는 그렇게 정학을 먹었다. 그리고 반 아이들은 아무 힘도 없고 아무 소리도 못했던 담임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가 종례나 수업을 하고 있으면 아무도 고개를 들거나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그해 가을, 이번에도 축제는 하지 않지만, 그 대신 합창대회를 연다고 했다. 졸지에 봄 축제 취소 저항 운동의 핵이 되어 버린 우리 반도 합창곡을 하나 골라야 했다. 아이들은 이런 저런 곡들을 놓고 의논을 하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그래 그 노래로 정하자’고 의기투합했다.
곡명은 [파랑새]였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전래 민요를 편곡한 현대곡으로, 12음계 기법까지는 아니겠지만 뭔가 기묘한 음정의 어려운 곡이었다. 무엇보다, 녹두 장군 전봉준을 기리는 슬픈 노래라고 알려져 있다. 구한말 썩은 체제를 갈아엎고 일제도 몰아내기 위해 민란을 조직했다가 결국 참수당한 남자.
합창대회를 준비하면서 우리 반 아이들은 서로 지겹게도 싸웠다. 니가 잘못했니, 내가 잘했니, 지휘자가 못한다느니, 알토가 글러먹었다느니. 그러다가 합창대회 날, 우리 반은 못마땅한 교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연단 위로 올라갔다. 원곡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로 몰아쳐 부르다가 노래 마지막의 후렴구, 새를 쫓는 “위여! 위여!” 소리를 형상화한 거센 불협화음이 끝나자, 강당 내에는 숨죽인 침묵이 감돌았다. 교사들은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를 꾸짖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반일 노래에 감히 누가 딴지를 걸겠나.
얼마 전 그 시절의 친구가, 거의 25년 전의 그때 우리 담임이 아직 그 학교에 근무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자신의 조카를 통해 들었다고 했다. “아,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젊고 진지했던 그는 지금쯤 고목이 되어 있을까?
'과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 동아리 활동기 2 (0) | 2024.07.31 |
---|---|
그림 동아리 입문기 1 (1) | 2023.10.19 |
천주교와 진화 생물학 (0) | 2023.02.15 |
유년기에만 골목 대장 (0) | 2023.02.14 |
골목길의 노올자 (0) | 2023.0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