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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천주교와 진화 생물학

 

열혈 천주교 신자인 부모님 덕에 나는 유아 세례를 받고 어릴 때부터 종교 활동에 푹 빠져 자랐다. 일요일 오전 미사뿐 아니라 오후의 주일학교, 평일에도 삼시세끼 기도와 저녁 기도 모임, 성당 친구, 성당 여행, 각종 행사 등으로 왁자하고 (성스럽고) 바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참고 https://travelnvisit.tistory.com/m/29)

 

 

 

그러다가 슬슬 머리가 굵어지는 사춘기가 되면서 ''이라는 존재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마침 그맘때 성당에서는 일종의 성인식인 '견진성사'라는 의례를 치른다. 꽤 긴 기간 동안 수업을 듣고 나서 다함께 축복을 받는 자리(미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 전에는 짧으나마 신부와의 개별 면담 자리도 있었다. 개신교와 달리 천주교에서 일반 신자가, 그것도 청소년이 성직자를 독대할 수 있는 기회는 참 드문데, 사실 그것도 엄청 형식적인 자리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 어린 난 그 만남에서 뭔가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부모와 함께 한 면담 자리에서 사춘기의 나는 좀 뚱한 얼굴로 주저하며, 신의 존재를 믿기가 힘들어진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신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줄줄 이어지는 견진성사반 청소년들과의 면담에 지루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던 초로의 남성은, 갑자기 목소리를 쨍하게 높여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지금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고.

 

 

 

어린 나는 겁을 먹고 당황하기도 했지만, 순간 몹시 부당하고 한심한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안절부절인 나의 부모를 포함해서 우리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직자의 일방적인 노발대발을 듣기만 했다.

 

 

 

아마 그 이후로 나는 천주교에 정을 뗐고, 차차 본격적인 무신론자로 돌아섰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의 습관과 공동체의 소속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나를 교회에 계속 나가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꼭 합격시켜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던 입시에 성공해 대학생이 된 이후, 나는 교회에 발길을 딱 끊었다.

 

 

 

사실 그후로의 나도 비종교인으로서의 삶에 그다지 자신감이 충만했던 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아마 30대도 훌쩍 지나고 나서야, 무신론자라고 남들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도 무신론자라고 떠들고 다니는 건 아니다. 다만 늘 '어차피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 아닌가, 신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들 내심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전제를 깔고 모든 종교 관련 대화에 임할 뿐이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종교를 무시해온 나의 태도가 얼마전부터 좀, 아니 많이 바뀌었다. 계기는 진화생물학 관점을 인문학과 인간사에 적용시킨 저술가 유발 하라리의 책들을 읽고서였다. 그 동안의 다른 진화생물학 관련 책들은 그냥 무신론만 재확인시켜주는 데서 그칠 뿐이었는데, [사피엔스][호모 데우스] 같은 책들은 좀 달랐다. 과학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종교사를 설명하면서도 종교 자체의 힘과 중요성에 대해 놀라운 지점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에게는 신화와 종교가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 그것이 인간이 사회를 만들고 유지해나갈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요소라는 것. 그 동안의 나의 종교에 대한 무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오만이었는지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들에 회한과 뿌듯함과 겸손과 자만이 뒤섞인 깨달음이 밀려왔다.

 

 

 

결국 나는 혼자 살고 싶지 않고 그런 우리들을 묶어주는 존재는 신 이외에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신을 부정하는 건 나 자신을,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그럼 나는 다시 종교에 귀의하는 수밖에 없는 걸까? ... 그러기엔 생활이 너무나 분주하고, 번거로운 종교 활동에 일일이 참가하기가 번거롭고, 짧은 인생의 시간은 아깝다. 결국 나는 지극히 세속적인 인생을 살다가 죽기 직전 마음에 드는 신에게 몸을 의탁하는, 지극히 나약하고 인간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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