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그림 그리는 동아리에 들어간 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주 잘 하지는 못했다. 못 그리는 편은 아니라도, 적어도 그림으로 대학을 가고 직업까지 구하기엔 무리가 있는 솜씨였다. 그래도 평생 취미로 삼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대학생이 되면 꼭 그림 그리는 동아리에 들어가 거기서 멋진 친구도 사귀고 멋진 취미 생활도 하겠다고 결심했더랬다.
물어물어, 학내 유일한 그림 동아리에 찾아갔다. 학년초, 신입생을 유치하려고 열심인 다른 동아리들과 달리, 그림 동아리는 그 흔한 신입생 모집 부스 하나 차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부푼 기대를 안고 제발로 동아리방을 찾아오는 신입생이 넘쳐났다.
처음 동아리방, 이른바 ‘화실’에 들어갔을 때가 기억난다. 다른 동아리방들보다 훨씬 널찍한 공간에 캔버스와 이젤, 화구가 가득 널려 있었다. 문 바로 앞에는 낡디 낡으나마 커다랗고 묵직해 보이는 9인용 소파가 ㄷ자로 배치돼 입장객을 맞이했다. 9인용 소파에는 복학생으로 보이는 남자 대학생들 대여섯 명이 진을 치고 둘러앉아 담배를 피우며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저, 여기가…”
“신입생이야?” 그 중 한 명이 가운데 탁자 한켠에 놓인 서류철 가리키며 귀찮다는 듯 말했다. “저기 가입 원서 쓰고” 그리고 소파 뒤쪽의 게시판을 가리켰다. “저기 적힌 신입생 환영회 때 나오면 돼.”
그러고서 내가 소파 한쪽 끝에 옹송그리고 걸터앉아 가입서를 쓰는 동안 한 번 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다 쓰고 나서 잠시 미적거리다가 “안녕히 계세요.” 하고 조그맣게 말하며 일어섰다.
역시나 누군가 “어, 그래.” 하는 대꾸가 다였다.
뭐, 그 동안 받아왔던 요란한 관심보다는 이런 무심함이 속편한 데도 있다고 생각하며 화실을 나왔다.
어딘가 갈빗집에서 열렸던 신입생 환영회는 신입생이 100명도 넘게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나는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공지 사항 정도만 듣고 빠져나왔던 것 같다. 가입 원서 작성 때 선배들의 무성의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니, 대학교 그림 동아리의 로망이 나에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대부분 공대 남학생들과 생활과학대 여학생들로 구성된 동아리인 듯했다. 나와 같은 인문대 학생의 수는 꽤 적을 수밖에 없어서, 위화감도 느꼈지만 호기심도 일었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대학 생활에 대한 나의 열망이 꽤 강한 편이어서, 나는 신입생 환영회 다음부터 동아리방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환영회 때인가, 동아리방에서인가 그런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들어오려는 신입생들이 워낙 많아서 선배들이 처음에는 냉랭하게 대하고 말도 잘 시키지 않는다고. 그러면 의지가 약한 아이들은 떨어져 나가고, 열 명 정도 남게 된다고. 그때부터는 남은 후배들을 선배들이 아주 잘 챙겨줄 거라고.
아주 약한 수준의 신고식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인구밀집도가 높은 한국에 살면서 인기 많은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심한 신고식도 경험해 보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무튼 그림 동아리의 신고식은 이런 정도였다.
날마다 열심히 동아리방 혹은 화실을 나가보았다. 한동안은 소파 한켠에 앉아서 카드 게임 하는 복학생들을 우두커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점차 회장 오빠를 비롯한 몇몇 선배들이 그림을 그릴 준비를 도와주었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유화를 주로 그리는 동아리였다. 가르쳐준 대로 홍대앞 화방에 가서 유화 물감과 붓을 사가지고 왔다. 캔버스는 동아리방에 숱하게 쌓인 것들 중 하나를 골라 재활용하면 된다고 했다. 그럴 듯한 그림이 그려진 것은 손대지 말고, 캔버스 앞면에 찍찍 그어진 취소 붓자국이 있거나 단색으로 덮어 칠한 것 중에서도, 아직 졸업 전인 학번과 이름이 캔버스 뒤에 써진 것도 손대면 안 되었다.
그렇게 신입생들 대여섯 명과 소수의 선배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카드 게임을 하는 복학생들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 대신 유화를 그리는 데 사용되는 유기용매(테레빈유)의 쎄-한 냄새가 화실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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